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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마 시게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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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 重信, 1838년 ~ 1922년)는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약한 일본의 정치가이자 교육자이다. 사가번 출신으로, 유교 교육에 반발하여 란학을 배우고, 메이지 유신 이후 외국과의 교섭을 담당하며 재정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대장경, 참의 등을 역임하며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고, 1882년 입헌개진당을 창당하고 와세다 대학의 전신인 도쿄 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898년에는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인 제1차 오쿠마 내각을 조직했으나, 4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1914년에는 제2차 오쿠마 내각을 이끌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21개조 요구를 제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정책을 펼쳤다. 그는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 교육 분야에 공헌한 점을 높이 평가받지만,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922년 사망했으며,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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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마 시게노부
기본 정보
존칭 접두사종1위
후작
이름오쿠마 시게노부
원어 이름 언어ja
출생일1838년 3월 11일
출생지사가, 일본
사망일1922년 1월 10일
사망지도쿄, 일본
정당입헌개진당
신포토
헌정본당
무소속
입헌동지회
배우자오쿠마 아야코
서명
수상 정보
직책내각총리대신
군주다이쇼
임기 시작1914년 4월 16일
임기 종료1916년 10월 9일
전임자야마모토 곤노효에
후임자데라우치 마사타케
군주 1메이지
임기 시작 11898년 6월 30일
임기 종료 11898년 11월 8일
전임자 1이토 히로부미
후임자 1야마가타 아리토모
기타 정보
출신 학교홍도관 (사가 번교)
전직무사 (사가번사)
작위 및 훈장종1위
[[파일:JPN Daikun'i kikkasho BAR.svg|38px]] 대훈위국화장경식
[[파일:JPN Daikun'i kikkasho BAR.svg|38px]] 대훈위국화대수장
[[파일:JPN Toka-sho BAR.svg|38px]] 욱일동화대수장
[[파일:JPN Kyokujitsu-sho 1Class BAR.svg|38px]] 훈1등욱일대수장
대례기념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
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
두등제삼쌍룡보성
오스트리아 제실 레오폴트 훈장 그랑크루와
그랑크루스다레알올덴밀리타르데노사세니오라다콘세이상데비라비소자 훈장
백상제일등훈장
리츠델그로이트크로이스인데워르데반덴네델란트센레이 훈장
이탈리아 왕관 훈장 그랑 코르돈
적취 훈장
대일본제국헌법발포기념장
백취 훈장
성안나 훈장 일등
친족 (정치인)사위 오쿠마 노부츠네(귀족원 의원)
손자 오쿠마 노부유키(참의원 의원)
서명
내각제1차 오쿠마 내각
제2차 오쿠마 내각
취임일1898년 6월 30일 - 1898년 11월 8일
1914년 4월 16일
퇴임일1916년 10월 9일
원수 직책천황
원수메이지 천황
다이쇼 천황
내각 2제1차 이토 내각
구로다 내각
제2차 마쓰카타 내각
제1차 오쿠마 내각
제2차 오쿠마 내각
취임일 21888년 2월 1일 - 1889년 12월 24일
1896년 9월 22일 - 1897년 11월 6일
1898년 6월 30일 - 1898년 11월 8일 (총리 겸임)
1915년 8월 10일
퇴임일 21915년 10월 13일 (총리 겸임)
내각 3제2차 오쿠마 내각
제2차 오쿠마 내각
취임일 31914년 4월 16일 - 1915년 1월 7일 (총리 겸임)
1915년 7월 30일
퇴임일 31915년 8월 10일 (총리 겸임)
내각 4제2차 마쓰카타 내각
취임일 41897년 3월 29일
퇴임일 41897년 11월 6일
취임일 51873년 10월 25일
퇴임일 51880년 2월 28일
기타 직책 1귀족원 의원
취임일 61916년 7월 14일
퇴임일 61922년 1월 10일
기타 직책 2헌정본당 총리
취임일 71900년
퇴임일 71907년 1월 20일
기타 직책 3입헌개진당 총리
취임일 81882년 4월 16일
퇴임일 81894년

2. 초기 이력

오쿠마 시게노부는 1838년 히젠국 사가성 아래 회소꼬지(현 사가시 미즈가에)에서 사가번 번사 오쿠마 노부야스와 미이코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하치타로였다. 오쿠마 가는 지행 400[25](물성 120석[25][26])을 받고, 포술장을 맡은 상사 가문이었다.

7세 때 번교 고도칸(향교와 비슷)에 입교하여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 교육을 받았으나, 유교 이념에 반발하여 동료들과 함께 번교 개혁을 주장하다 1855년 퇴학당했다.[2] 이후 에다요시 신요에게서 국학(일본 전통사상)을 배우고, 난학료(蘭学寮, 네덜란드 학문 교습소)에 입학하여 서양 학문을 공부했다. 1861년 난학료가 지방 학교와 합병되면서 오쿠마는 강사직을 맡았다.

1862년부터 후쿠시마 타네오미, 마에지마 히토시 등과 함께 미국성공회의 미국인 선교사 채닝 윌리엄스(릿쿄대학 창설자)의 사숙에서 영학을 배웠다.[28][21][29] 1865년 나가사키에 영어 학교 지엔칸(致遠館)이 설립되자 후쿠시마 다네오미와 함께 이를 지도하고 자신도 직접 영어를 배웠다.

오쿠마는 존왕파로서 메이지 유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67년 소에지마 타네오미와 함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사직을 권고할 계획을 세웠으나, 체포되어 사가로 송환되어 1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 징계 후, 나베시마 나오마사에게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자 존왕파였던 오쿠마는 외국사무국 판사(담당자)에 임명되어 외국과의 교섭을 담당했다. 1869년부터는 회계관 부지사에 임명되어 재정 금융분야도 책임졌다.

1873년 5월 대장성 사무 총재, 10월에는 대장경(大蔵卿)이 되었다. 오쿠마는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젊은 인재를 등용하고 기도 다카요시와 연합하여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진, 오쿠보 도시미치를 견제했다. 대장성은 봉건적인 토지제도를 근대화하는 지조(地租) 개혁사업과 산업 진흥정책을 추진했다.

오쿠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에 반대했다. 세이난 전쟁 당시 오쿠마는 전비 지출에 관한 재정 운용을 책임졌다.

이후 자유 민권 운동에 동조하여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냈다. 1881년 정책 차이와 재정 운용 실패로 참의에서 해임되어 정부를 떠났다.[1]

3. 1. 일본 최초의 철도 부설

1869년 12월 12일(메이지 2년 11월 10일), 오쿠마 시게노부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철도 부설을 정식으로 결정했다.[36] 이들은 영국 외교관 파크스와 비공식 회담을 통해 철도 부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파크스는 흉작 지역에 식량을 신속하게 운송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철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산조 사네토미이와쿠라 도모미도 이에 동의했다.[36]

회담 결과, 간선 철도로 도쿄와 교토를 잇고, 지선으로 도쿄-요코하마, 비와호-쓰루가항 노선을 부설하기로 결정되었다. 특히 도쿄-요코하마 구간은 정치, 외교 중심지를 연결하고 외국 자재 수입 항만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우선 착공되었다.[36]

당초 도쿄-간사이 노선은 나카센도를 따라 계획되었으나, 육군의 반대와 산간 지역 개발의 어려움으로 인해 도카이도 노선으로 변경되었다.[37][38]

자금 조달은 외채에 의존하게 되면서, 마에하라 카즈나리 등 육군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외채 모집이 국가를 담보로 하는 행위라며 반발했고, 전신선을 손상시키는 등의 행위도 발생했다.[39] 구로다 기요타카 역시 초기에는 반대했지만, 미국과 유럽 여행 후 철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찬성으로 돌아섰다.[39]

1869년 12월 12일, 오쿠마와 이토는 영국인 기술자 레이와 임시 계약을 체결하고, 100만 파운드의 차관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36] 오쿠마는 레이의 조언에 따라 협궤(1067mm, 케이프 게이지)를 채택했는데, 이는 레이가 중고 자재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였다.[40] 훗날 오쿠마는 이 선택을 후회했지만, 당시에는 레이의 사기 행위가 발각되어 차관 계약이 해제되기도 했다.[40]

1872년 6월 12일(메이지 5년 5월 7일) 시나가와-요코하마 간 임시 영업을 시작으로,[41] 같은 해 10월 14일(메이지 5년 9월 12일) 정식 개통되었다.

4. 하야 이후

1882년, 오쿠마는 국회 개설에 대비하여 입헌개진당을 창당하였고, 고노 아즈사, 오자키 유키오, 이누카이 쓰요시, 야노 류케이 등이 참여하였다.[7] 같은 해, 와세다 대학의 전신이 되는 도쿄 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7]

도쿄 전문학교(1884년 5월)

5. 총리 취임과 정계 은퇴

1888년 2월, 이토 히로부미는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오쿠마를 외무대신으로 임명했다. 구로다 기요타카가 총리에 취임했지만, 오쿠마는 외상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오쿠마의 정책에 반대하는 극우단체 겐요샤(玄洋社) 조직원이 던진 폭탄에 의해 오쿠마는 오른쪽 다리를 잃고 사임했다.[8]

1896년 제2차 마쓰카타 내각에서 다시 외상에 임명되었지만, 사쓰마 파벌과의 대립으로 1897년 사임했다. 1898년 6월, 헌정당(憲政黨)을 창당하고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으나, 당내 파벌 다툼으로 4개월 만에 내각이 총사직되었다. 이후 헌정본당(憲政本党)을 이끌다가 1907년 정계에서 은퇴하고 와세다 대학 총장에 취임했다.

5. 1. 제1차 오쿠마 내각 (1898)

총리 시절의 오쿠마 시게노부


1898년 6월, 오쿠마 시게노부는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자유당과 연합하여 헌정당을 창당하고,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조각의 대명을 받아 내각총리대신 겸 외무대신이 되었다.[8] 이로써 일본 최초의 정당내각이 탄생했다.[8] 육해군대신을 제외한 모든 각료는 헌정당원이었으며, 오쿠마와 이타가키가 주도하는 체제였기에 '구판내각'으로 불렸다.

그러나 헌정당은 구 자유당 계열과 구 신보당(진보당) 계열 간의 대립으로 불안정했다. 특히 구 자유당의 호시 토오루는 헌정당 내각이 야합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퇴진 공작을 펼쳤다.[8]

이러한 상황에서 오자키 유키오 문부대신의 공화연설 사건이 발생했다. 호시는 이를 맹렬히 공격했고, 이타가키 내무대신도 메이지 천황에게 오자키의 파면을 요구했다. 결국 오쿠마는 천황의 명령으로 오자키에게 사표를 제출하게 했다.

후임 문부대신으로 오쿠마는 이누카이 쓰요시를 임명했지만, 자유당 계열은 이에 반발하여 각료를 사임시키고 헌정당을 해산, 새로운 헌정당을 결성했다. 오쿠마는 신진당 계열로 각료를 보충하려 했으나, 천황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1898년 10월 31일, 오쿠마 내각은 4개월 만에 총사직하게 되었다.

6. 정계 복귀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지멘스 사건으로 사임하면서 1914년 오쿠마 시게노부가 다시 총리직을 맡아 정계에 복귀했다. 그해 7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쿠마 내각은 중국 대륙에서 독일 제국의 이권을 빼앗기 위해 8월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915년, 오쿠마 내각은 외무대신 가토 다카아키와 함께 중화민국21개조 요구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열강의 불신을 사고 중국의 반식민지 운동을 초래했다.

내무대신 오우라 마사다케의 독직 사건으로 오쿠마 내각은 국민의 지지를 잃었고, 1916년 10월 사퇴하며 오쿠마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6. 1. 제2차 오쿠마 내각 (1914-1916)

1914년(다이쇼 3년) 지멘스 사건으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수상이 사퇴하자, 오쿠마가 수상 후보로 크게 주목받았다.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처음 지지한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사퇴하고, 원로 이노우에 가오루의 비서 모치즈키 고타로는 오쿠마와 접촉하여 헌정동지회가토 다카아키를 협력시킨 후, 오쿠마에게 조각할 의향이 있는지 타진했다.[50] 오쿠마는 이노우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했다. 야마가타가 다음으로 추천한 기요우라 게이고가 사퇴로 몰린 후(우나카 내각), 원로회의는 오쿠마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되었다.[50] 4월 10일 원로회의에서 야마가타는 오쿠마를 추천했고, 이노우에, 오야마 이와오, 마쓰카타 마사요시도 동의했다.[50] 이날 이노우에로부터 조각을 제의받은 오쿠마는 가토 다카아키를 수상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답했지만 거절당하고, 결국 자신이 수상이 되는 것을 승낙했다.[50]

4월 16일, 76세의 나이로 두 번째 내각을 구성했다. 다시 수상에 취임하기까지 16년이라는 공백은 역대 최장 기록이다. 오쿠마는 수상과 내무대신을 겸임했다.[50] 여당은 헌정동지회, 중정회였다. 동지회에서는 가토 다카아키가 외무대신,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대장대신, 오우라 가네타케가 농상무대신, 다케토미 도키토시가 체신대신으로 입각했고, 중정회에서는 과거의 측근 오자키 유키오가 사법대신으로 입각했다.[50] 헌정국민당은 과거의 측근이었던 이누카이 쓰요시가 당수를 맡고 있었지만, 당을 분열시킨 가토를 싫어하여 참여하지 않았다.[50] 해군대신에는 비사쓰마파, 육군대신에는 야마가타 계열이 취임했다.[50] 오쿠마 내각은 성립 직후, 종래 사쓰마파가 장악하고 있던 경시총감에 비사쓰마파의 이자와 다키오를 임명하고, 19명의 지사와 29명의 도현 부장을 이동시키는 등 지방 인사를 대폭 변경했다.[50] 더욱이 해군에서도 사쓰마파의 유력자를 한직으로 밀어내고, 야마모토 곤노효에·사이토 마코토 등 거물을 예비역으로 편입시키는 등 숙군을 실시했다.[50] 또한 문정일원화라는 명목으로 내무성의 관할이었던 전염병연구소의 문부성 이관을 강행하여,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소장 이하 부장·연구원은 항의하여 전원 사퇴했다(전염병연구소 이관 사건). 1916년(다이쇼 5년)에는 전염병연구소가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부속 연구소가 되고, 야인으로 내려간 기타사토의 기타사토 연구소와 경쟁하게 되었다.[50]

7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중국 대륙에서의 권익 확보를 위해 연합국 측에 서서 참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50] 가토 다카아키 외무대신은 원로의 개입을 싫어하여, 원로와의 협의 없이 각의에서만 참전을 결정하여 야마가타를 격분시켰다.[50] 그러나 참전 자체는 원로도 지지했기 때문에 결정은 뒤집히지 않았고, 8월 23일 독일선전포고를 했다. 오쿠마는 가토를 영국식 정치를 하는 후계자로 생각했지만, 가토는 독선적이었고, 오쿠마도 외교에 대해서는 거의 간섭할 수 없었다.[50] 그러나 강경 일변도의 외교 방침은 야마가타 등 원로의 불만을 사서, 오쿠마는 가토를 보호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50] 12월까지 일본군은 독일의 거점인 칭다오 요새와 남양 제도를 공략했고, 일본은 승전 분위기에 휩싸였다.[50]

12월에는 2개 사단 증설 문제에 반대하는 정우회와 국민당이 법안을 부결시키자, 오쿠마는 12월 25일 중의원 해산을 단행했다.[50] 당시, 러일전쟁 이후의 불황으로 국민이 고통받고 있었고, 정우회와 번벌, 군에 대한 불신도 높아지고 있었다.[50] 오쿠마는 조각 직후부터 선거를 의식하여 원로와 협의하고, 자금 모금도 거듭해 왔다.[50] 더 큰 무기가 된 것은 오쿠마 개인의 인기였다. 오쿠마는 전국을 철도로 대규모 유세 여행을 하고, 역마다 연설을 했다.[50] 또한 오쿠마는 동지회와 중정회에 이어 제3의 여당으로, 조각 이후 전국에 설립되어 있던 오쿠마 백작 후원회를 이용했다.[50] 특히 선거 직전에 오우라 가네타케를 내무대신으로 전임시켜 정권의 힘을 이용한 격렬한 선거 개입은, 오쿠마 내각을 지지하고 있던 요시노 사쿠조조차 실망시킬 정도였다.[50] 이렇게 1915년(다이쇼 4년) 3월 25일에 실시된 제1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오쿠마 여당이 65%를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50]

1915년 1월 18일, 중화민국 정부에 권익의 계속 및 양도 등을 요구하는 대륙에 대한 21개조 요구를 제시한다. 오쿠마 시게노부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교주만 조차지 반환의 대가로 만주에 권익을 얻는 것을 생각했지만, 열강에도 이권을 제공하여 마찰을 방지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51] 그러나 가토 다카아키 외무대신은 육군 등의 강경한 의견을 모두 요구에 담아, 원로와의 최종적인 협의도 하지 않은 채 중화민국 측에 제시했다.[51] 일본인을 중화민국 정부의 관료로 등용시키는 제5호는 다른 요구와 달리 희망 조항이었지만, 중국의 내정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가토 외무대신은 동맹국 영국에도 비밀로 한 데다, 중화민국 측에도 이를 공표하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었다.[51] 그러나 중화민국으로부터의 정보 유출로 영국, 미국이 알게 되면서, 제5호는 삭제되었다.[51]

5월 9일, 중화민국 정부는 주요 요구를 수용했지만, 열강의 불신을 사고, 중국의 반식민지 운동을 고조시키는 결과가 되었다.[51] 오쿠마는 가토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외교에서도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토의 행동을 묵인하게 되었다.[51] 오쿠마는 후에 잡지에서 "요구는 침략적인 것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이며, 일본은 영원한 평화를 쌓으려고 성의를 가지고 협상했는데, 중화민국은 외국을 개입시켜 유리하게 끌고 가려고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51] 이후, 중의원에서는 가토 외무대신 탄핵안이 제출되었지만, 오쿠마 계열의 여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결되었다.[51] 협상의 자세한 상황이나 열강의 개입에 대해서는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큰 정치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51]

다이쇼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한 오쿠마 시게노부와 아야코 부부


1915년 7월 하순, 오우라 가네타케 내무대신이 2개 사단 증설 문제 결의 당시 야당 의원들을 매수했다는 의혹이 드러났다(오우라 사건).[52] 오쿠마는 오우라의 매수 공작을 몰랐다고 히라누마 기이치로 검찰총장에게 말했지만, 그 모습을 히라누마는 “교활하다”라고 표현했다.[52] 7월 30일 오우라는 사임했고, 오쿠마도 감독 책임을 진다는 명목으로 사표를 제출했지만, 이는 천황으로부터 유임 명령이 내려올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었다.[52] 오쿠마의 예상대로, 오쿠마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던 다이쇼 천황은 원로와 상의하지 않고 사표를 반려했다.[52] 내각 기반이 약하다고 느낀 가토 외무대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각료가 사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2] 그러나 원로들은 다이쇼 천황의 즉위 대례를 앞두고 정변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력하게 만류했고, 또한 오쿠마도 정권 유지를 강력히 원했기 때문에, 8월 10일 자신이 외무대신을 겸임하는 개조내각을 발족시켰다.[52] 11월 10일에는 즉위 대례가 거행되었는데, 의족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연습을 한 오쿠마는 계단 오르내림을 수반하는 의식을 완수했다.[52]

1916년(다이쇼 5년) 1월 12일, 오쿠마가 타고 있던 마차에 후쿠다 와고로 등 일당 8명이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불발되어 무사히 넘어갔다.[54] 이 무렵 이노우에 가오루가 사망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원로의 강화를 위해 오쿠마를 원로로 가입시키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54] 오쿠마도 고령이었고, 영원히 수상직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지만, 후계자로 가토 다카아키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에, 야마가타와의 협상이 계속되게 되었다.[54] 6월 24일, 오쿠마는 다이쇼 천황에게 사의를 표명하고, 후계자로 가토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대장을 추천하여, 오쿠마-데라우치 내각과 같은 양자 공동 내각을 만들려고 했다.[54] 그러나 이것은 데라우치에게 거절당했고, 야마가타는 니시온지 긴모치와 정우회와 함께 단독 데라우치 내각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54] 7월 14일 후작에 서작하여, 귀족원 후작의원이 되었다.[55]

9월 26일, 오쿠마는 사의를 천황에게 표하고, 후계자로 가토를 지명했다.[54] 오쿠마는 오야마 이와오 내무대신에게 원로 회의를 열지 않고 가토에게 조각의 대명이 내려지도록 요청했지만, 오야마는 이를 거절했고, 오야마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야마가타도 격노했다.[54] 야마가타는 "오쿠마에게 1년 반이나 속았다"고 쏘아붙였다.[54] 10월 4일, 오쿠마는 사표를 제출했지만, 사표에서도 가토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이례적인 형식이었다.[54] 그러나 야마가타의 운동으로 다이쇼 천황은 원로에게 자문을 구했고, 야마가타·마쓰카타 마사요시·오야마의 삼원로와 니시온지는 데라우치를 일치하여 추천했고, 데라우치 내각이 성립했다.[54]

퇴임 당시 나이는 만 78세 6개월로, 이는 역대 총리대신 중 최고령 기록이다.

7. 이후

오쿠마 시게노부는 총리 재임 중 후작 작위를 받았다.[9] 1922년 도쿄 와세다에서 사망했으며, 많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아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9]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전례 없이 많은 추모 인파가 모였고, 운구가 지나는 길가에도 많은 시민들이 나와 추모에 동참했다.

사망하기 1년 전의 오쿠마 시게노부


1921년 9월부터 감기 증세로 요양하던 오쿠마는 신장염과 방광카타르가 겹쳐 쇠약해졌다. 와세다대학과 헌정회 등은 오쿠마 숭상 운동을 펼치며 국장 실현과 공작 승작, 위계 및 훈장 승서를 추진했지만, 원로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56] 결국 오쿠마에게는 종일위 승계와 기쿠카쇼 쇼케이(훈장) 수여가 결정되었다.[57][58]

1922년 1월 10일, 오쿠마는 와세다 자택에서 복부 암과 위축성 신장염으로 사망했다. 향년 83세였다.

오쿠마의 측근 이치시마 켄키치는 "세계적인 민주주의 정치가"인 오쿠마를 국민장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쿠마 가는 도쿄시에 히비야 공원을 고별식 장소로 대여해 줄 것을 신청하여 허가받았다. 장례위원회는 일반인 참례가 가능한 국민장 연출을 준비했다. 1월 17일 히비야 공원에서 국민장이 거행되었고, 약 30만 명의 시민들이 참례했다. 호치 신문은 100만 명이 길가에 줄을 섰다고 보도했다. 이후 분쿄구 고코쿠지 묘소에서 매장식이 거행되었다. 오사카시, 삿포로시, 경성, 베이징 등에서도 고별식이 거행되었다. 사가시 류타이지에도 오쿠마의 묘소가 있다.

8. 평가

오쿠마 시게노부는 근대 일본의 발전에 기여한 주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바탕으로 일본의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교육 분야에서의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 하지만 제국주의적인 대외 정책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오쿠마는 1922년 사망하였는데, 그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수많은 추모 인파가 몰렸고, 운구가 지나는 연도에도 많은 시민들이 나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9] 이는 그가 국민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오쿠마는 "있다(あるんである)" 또는 "있다있다(あるんであるんである)"라는 독특한 말투를 즐겨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오쿠마 관련 문서는 모두 구술필기에 의한 것이며, 오쿠마 자신의 자필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고도칸(弘道館) 재학 시절 글씨를 잘 쓰는 학우에게 경쟁심을 느껴 글씨 쓰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오쿠마는 암기 위주로 공부했으며, 책을 출판할 때도 구술필기로 마무리하여 죽을 때까지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일본제국헌법 공포 시에는 국무대신의 서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오쿠마의 자필 서명이 남아 있다. 이 서명에서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라는 글씨는 다른 국무대신들의 서명에 비해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60]

오쿠마는 영어 문장을 읽을 수 없었고, 번역문을 통해 외교적 판단을 내렸다. 란학료 시대에는 "감(勘)"으로 네덜란드어 해독을 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또한 700페이지 정도의 네덜란드어로 쓰인 나폴레옹 전기를 1년 반에 걸쳐 읽었다고 한다.

다카다 사나에는 오쿠마와의 첫 만남에서 그를 "걸출한 인물"로 보았지만, "친근하지 않은 엄격한 느낌"도 받았다고 회상했다.[62] 오쿠마의 호방하고 磊落한 이미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친구였던 고다이 토모아쓰는 오쿠마에게 자만심이 강하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며, 분노를 터뜨리는 것을 그만두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메이지 14년의 정변 이후에는 그러한 언행을 삼가게 되었다.

오자키 유키오는 오쿠마가 "한 번 들은 것은 결코 잊지 않았다"고 하며 그의 뛰어난 기억력을 언급했다. 또한 지성과 도량 면에서도 이토 히로부미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능가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거의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하며, 그 원인을 오쿠마의 성격에서 찾았다. 오자키는 이토와 오쿠마가 바둑을 두었던 일을 예로 들어, 오쿠마가 신중함이 부족하여 결국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1902년부터 1919년까지 오쿠마 시게노부를 총재로, 사이토 세이스케를 편집장으로 하여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백과사전인 『일본 백과대사전』의 편찬이 이루어졌다.[83] 1915년에는 축음기에 녹음된 오쿠마의 총선거 응원 연설 목소리가 2007년에 공개되기도 했다. 오쿠마는 정치와 교육 외에도 마스크멜론 협회 설립, 제국 애회 초대 회장, 일본 원예회 회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토 요시오는 공식 전기인 『오쿠마 백오십년사』가 오쿠마를 “사쓰마・조슈 등의 藩閥(한벌)과 싸운”, “민중의 정치가”로 묘사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마나베 마사유키는 오쿠마가 전반생에서는 반드시 “민중 정치가”는 아니었으며, 후반생에서의 변화를 그리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조이스 리브라는 오쿠마를 “민주주의를 추진한”, “파격적”이고 “변화무쌍한” 행동을 한 “일본 최초의 민중 정치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8. 1. 긍정적 평가

오쿠마 시게노부는 자유 민권 운동을 지지하고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을 주장하며 일본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1] 또한, 입헌개진당을 창당하여 정당 정치의 기반을 마련했다.[7]

교육 분야에서는 와세다 대학의 전신인 도쿄전문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7] 와세다 대학은 훗날 일본을 대표하는 명문 사학으로 성장했다.

경제 및 사회 개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철도 부설, 통화 개혁, 산업 진흥 정책 등을 추진하며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했다.[6]

8. 2. 부정적 평가

오쿠마 시게노부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 제국의 이권을 빼앗고, 중화민국21개조 요구를 하는 등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9] 1914년 두 번째 총리 재임 시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21개조 요구 등 제국주의적 대외 정책을 추진하여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9] 잦은 정계 개편과 당내 파벌 다툼으로 안정적인 정치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또한, 내무상 오우라 마사다케의 독직사건(오우라 사건)으로 인해 국민의 지지를 잃고 1916년 사퇴하여, 내각 구성원의 비리 사건으로 도덕성에 흠집이 생겼다.[9]

9. 유산

사가현에 있는 오쿠마 시게노부 생가


사가현 사가시에 있는 오쿠마 시게노부의 생가는 현재 오쿠마 시게노부 기념관의 일부로 보존되어 있으며, 1965년에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10]

와세다 대학에는 오쿠마 시게노부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여러 개 있다. 와세다 대학 와세다 캠퍼스에는 두 개의 대쿠마상이 있는데, 하나는 1932년 10월 17일 와세다 대학 설립 50주년과 오쿠마 시게노부 10주기를 기념하여 제작된 가운 차림의 입상이다. 이 동상은 조각가 아사쿠라 후미오가 제작했으며, 오쿠마 강당 방향을 향하고 있다.[118][119] 다른 하나는 오쿠마 강당 안에 있는 예복 차림의 동상으로, 오구라 소지로가 제작했다. 이 동상은 1907년에 대학 설립 25주년과 오쿠마의 만 70세를 기념하여 세워졌다.[120][122]

국회의사당 중앙 현관 1층에는 일본 최초의 정당내각을 수립한 오쿠마 시게노부의 공적을 기념하여 이토 히로부미,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함께 그의 동상이 장식되어 있다. 이 동상은 1938년 2월에 메이지 헌법 공포 50주년을 기념하여 아사쿠라 후미오가 제작했다.

사가현 사가시에 있는 오쿠마 기념관 안에도 오쿠마 동상이 있는데, 1988년 4월에 오쿠마 시게노부의 생가 터에 세워졌다. 이 상은 오구라 소지로의 상을 복제한 것이다.[120]

10. 연표


  • 1838년 3월 11일: 사가현 사가시 히젠 국에서 사가 번(佐賀藩) 포병 장교 오쿠마 노부야스(大隈信安)와 미이코(美幾)의 첫째 아들로 출생.[1][2][3]
  • 1844년: 7세에 번교(藩校) 고도칸(弘道館)에 입학, 주로 유교 경전 공부.[2]
  • 1854년: 동급생들과 학교 교육에 반기를 듦.[2]
  • 1855년: 폭동을 일으킨 죄로 퇴학, 란가쿠(蘭学) 기관으로 옮김.[1][2]
  • 1861년: 란가쿠 학교가 지방 학교와 합병, 강사직을 맡음. 손노조이(尊王攘夷) 운동에 공감, 조슈 번(長州藩)과 도쿠가와 막부 사이의 중재 주장.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선교사 기드 베르벡(Guido Verbeck)에게 영어, 신약 성서, 독립 선언서 등을 배움.[4]
  • 1867년: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에게 사직 권고 계획을 세웠으나 체포, 징역형 선고.[1][5]
  •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새 정부 외무 담당 관리 임명, 영국 외교관 해리 스미스 파크스 경과 기독교 금지 문제 협상.[6]
  • 1870년: 제1차 일본 의회 당선, 재무대신(Minister of Finance)으로 부동산 및 세금 개혁 실시.
  • 1873년: 일본 정부의 기독교 금지 해제. 비엔나 만국 박람회 일본 정부 대표.
  • 1881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과의 갈등으로 해임.
  • 1882년: 입헌개진당(立憲改進党) 창당, 도쿄 전문학교(東京専門学校)(현 와세다 대학) 설립.[7]
  • 1888년: 이토 히로부미 내각 외무대신(Foreign Minister) 임명, 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
  • 1889년: 현양사(玄洋社) 조직원의 폭탄 테러로 부상, 정계 은퇴.[8]
  • 1896년: 입헌개진당을 신보당(進歩党)으로 재편, 정계 복귀.
  • 1897년: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내각 외무대신 겸 농상무대신(Agriculture and Commerce Minister) 임명, 1년 만에 사임.
  • 1898년: 신보당과 자유당(自由党)을 합병, 헌정당(憲政党) 창당. 일본 최초 정당 내각인 제1차 오쿠마 내각 수립, 내분으로 4개월 만에 해체.
  • 1908년: 정계 은퇴, 와세다 대학 총장, 일본 문명 협회 회장 역임.
  • 1914년: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 사임 후 정계 복귀, 제2차 오쿠마 내각 수립. 제1차 세계 대전연합국으로 참전.
  • 1915년: 중국21개조 요구 제출. 오우라 사건으로 내각 지지율 하락.
  • 1916년: 총리직 사임, 정계 은퇴. 욱일대수장 수훈, 후작 작위 받음.
  • 1922년: 사망, 국민장 거행. 고코쿠지에 안장. 사후 욱일대수훈장 추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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